목숨 걸고 나라 지켰는데…조국에 학살 당한 독립운동가들 [광복80주년]③
입력 2025.08.09 (09:00)
수정 2025.08.09 (09:07)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일제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들은 조국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했습니다. 비밀리에 항일 단체를 조직하거나 무장 투쟁에 나섰고, 때론 옥고를 치르면서도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그토록 바라던 광복이 찾아온 뒤, 그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놀랍게도 해방 이후, 이들 중 일부는 '반국가 세력'으로 낙인찍혀 되레 학살당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한 독립운동가가 묻힌 학살터는 훼손돼 유해조차 찾을 수 없었고, 끝내 독립운동을 인정받지 못한 채 역사 속에서 지워진 이도 있었습니다. 그 비극의 역사와 과제를 자세히 살펴봅니다. |
■ 조국에 희생된 독립운동가… 여전히 외면 당해

박태수 씨의 아버지, 고 박기철 선생은 1930년부터 15년간 충북 영동 지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습니다.
당시 박 선생은 문맹 퇴치를 위해 야학을 열어 주민들에게 한글과 한자를 가르쳤고, 청년회를 조직해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며 지역 민중운동에 앞장섰습니다.
3·1운동 이후 제2의 만세 운동을 대비해 여성과 주민들에게 태극기와 무궁화 꽃을 만들어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활동도 이어갔습니다.
일제 강점기 재판 기록에도 박 선생이 소년 운동을 지도하고 부인 야학을 조직했다는 내용이 남아 있습니다.

해방 이후, 박기철 선생은 독립운동을 함께했던 동료들과 함께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습니다.
당시 정부는 좌익 사상 전향자들을 ‘보호하고 지도한다’는 명분으로 보도연맹을 조직했고, 지역마다 가입자 수를 할당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좌익 여부와 무관하게 수많은 국민이 강제로 가입됐고, 박 선생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습니다.
전쟁 초기, 이승만 정부는 보도연맹 소속 인사들이 ‘적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조사나 재판 없이 집단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박 선생도 그해 7월 20일, 보도연맹 소속 동료들이 희생됐다는 소식을 듣고 황간지서를 항의 방문했다가 경찰에 연행돼 결국 숨졌습니다.
그토록 되찾고 싶었던 조국의 땅에서, 조국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겁니다.
남겨진 가족들의 삶도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은 그날 이후 수십년간 국가의 감시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간첩이 남파하면 접선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두 차례나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지만 모두 반려됐습니다.
국가보훈처는 "적극적인 독립운동 참여 여부가 불분명하다”고 답했습니다.
어느새 백발이 된 아들 박태수 씨의 마지막 소원은 아버지가 걸어온 길을 인정받는 것, 하나 뿐입니다.
박 씨는 "독립을 위해 애쓰다가 정부에서 요구해 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되고, 나라로부터 학살을 당하다니 참 기구한 운명"이라면서 "아버지의 독립운동 사실을 인정받을 수 있다면 마음편히 눈 감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 총탄에 쓰러지고, 무덤까지 사라져….

홍가륵 선생은 22살의 나이에 의열단에 가입하며 독립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의열단에서 전문 항일 투쟁 교육을 받고, 평양과 서울에서 활동하다 일제 경찰에 체포됐습니다.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는 동안에도 그의 신념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홍 선생은 일제 경찰의 심문에서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독립운동 사실을 당당히 밝혔습니다.
해방 뒤, 홍 선생은 수의사 자격을 취득해 진천군청에 근무했습니다.
그러던 중 1948년 충북 진천군 이월면에서 발생한 시국 사건에 연루돼 징역 4년을 선고받고 청주형무소에 수감됐습니다.
1953년에 출소를 앞두고 있었지만, 1950년에 6·25 전쟁이 발발하저 이승만 정권은 예비검속자와 보도연맹원과 정치범들을 재판도 없이 집단 처형하기 시작했습니다.
'형무소 재소자들이 인민군에 협조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홍가륵 선생은 그해 7월, 충북 청주시 낭성면 도장골로 끌려가 100여 명의 민간인과 함께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총살됐습니다.
그의 나이 37세였습니다.
2009년, 국가보훈처는 홍가륵 선생의 항일투쟁을 인정해 독립유공자 애족장을 추서했습니다.
이듬해 진실화해위원회도 홍 선생이 이승만 정권 하 민간인 학살의 희생자임을 공식 확인하고, 유해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충북 청주 도장골에 대한 유해 발굴을 권고했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 아무 조치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홍 선생이 묻힌 자리에는 집중호우 피해를 막기 위한 수해 방지 시설이 들어섰습니다.
시설을 설치하기 위해 청주시는 벌채 공사를 허가했고, 충청북도는 사방댐을 조성했습니다.
해방된 나라의 총탄에 쓰러진 그의 무덤마저 지워진 겁니다.
수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죽어간 학살터에는, 이제 무성하게 자란 잡초 사이로 '청주형무소 사건 희생지'라는 작은 간판만 남아 있습니다.

홍가륵 선생의 아들 홍우영 씨는 "이제는 유해를 찾을 수 있다고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고 한탄했습니다.
다만 "아무 때라도 모여서, 찾아가서 인사라도 드릴만한 장소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 광복 80년인데… '학살 피해 독립운동가' 실태 조사 요원
광복 80년을 맞았지만, 해방 이후 국가 폭력에 희생된 독립운동가들의 구체적인 실태는 여전히 제대로 파악조차 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보도연맹 등 시국 사건에 연루돼 희생된 일부 독립운동가는 공적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고, 후손들은 나라로부터 감시당했습니다.
부모가 독립운동을 했더라도 연좌제 우려로 자녀에게 숨기기도 했습니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항일 운동에 모든 걸 바쳤지만, 조국으로부터 희생당한 이들을 위해 이제라도 합당한 예우를 갖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박만순 충북역사문화연대 대표는 "자식들조차 우리 아버지가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한 훌륭한 독립운동가라는 사실 자체도 모른 채 살아왔다"면서 "관련 실태 조사와 공식적인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관련기사] 독립운동 앞장섰는데…국가 폭력에 희생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298881)
촬영기자 김성은, 그래픽 조은수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목숨 걸고 나라 지켰는데…조국에 학살 당한 독립운동가들 [광복80주년]③
-
- 입력 2025-08-09 09:00:32
- 수정2025-08-09 09:07:43

일제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들은 조국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했습니다. 비밀리에 항일 단체를 조직하거나 무장 투쟁에 나섰고, 때론 옥고를 치르면서도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그토록 바라던 광복이 찾아온 뒤, 그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놀랍게도 해방 이후, 이들 중 일부는 '반국가 세력'으로 낙인찍혀 되레 학살당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한 독립운동가가 묻힌 학살터는 훼손돼 유해조차 찾을 수 없었고, 끝내 독립운동을 인정받지 못한 채 역사 속에서 지워진 이도 있었습니다. 그 비극의 역사와 과제를 자세히 살펴봅니다. |
■ 조국에 희생된 독립운동가… 여전히 외면 당해

박태수 씨의 아버지, 고 박기철 선생은 1930년부터 15년간 충북 영동 지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습니다.
당시 박 선생은 문맹 퇴치를 위해 야학을 열어 주민들에게 한글과 한자를 가르쳤고, 청년회를 조직해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며 지역 민중운동에 앞장섰습니다.
3·1운동 이후 제2의 만세 운동을 대비해 여성과 주민들에게 태극기와 무궁화 꽃을 만들어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활동도 이어갔습니다.
일제 강점기 재판 기록에도 박 선생이 소년 운동을 지도하고 부인 야학을 조직했다는 내용이 남아 있습니다.

해방 이후, 박기철 선생은 독립운동을 함께했던 동료들과 함께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습니다.
당시 정부는 좌익 사상 전향자들을 ‘보호하고 지도한다’는 명분으로 보도연맹을 조직했고, 지역마다 가입자 수를 할당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좌익 여부와 무관하게 수많은 국민이 강제로 가입됐고, 박 선생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습니다.
전쟁 초기, 이승만 정부는 보도연맹 소속 인사들이 ‘적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조사나 재판 없이 집단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박 선생도 그해 7월 20일, 보도연맹 소속 동료들이 희생됐다는 소식을 듣고 황간지서를 항의 방문했다가 경찰에 연행돼 결국 숨졌습니다.
그토록 되찾고 싶었던 조국의 땅에서, 조국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겁니다.
남겨진 가족들의 삶도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은 그날 이후 수십년간 국가의 감시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간첩이 남파하면 접선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두 차례나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지만 모두 반려됐습니다.
국가보훈처는 "적극적인 독립운동 참여 여부가 불분명하다”고 답했습니다.
어느새 백발이 된 아들 박태수 씨의 마지막 소원은 아버지가 걸어온 길을 인정받는 것, 하나 뿐입니다.
박 씨는 "독립을 위해 애쓰다가 정부에서 요구해 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되고, 나라로부터 학살을 당하다니 참 기구한 운명"이라면서 "아버지의 독립운동 사실을 인정받을 수 있다면 마음편히 눈 감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 총탄에 쓰러지고, 무덤까지 사라져….

홍가륵 선생은 22살의 나이에 의열단에 가입하며 독립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의열단에서 전문 항일 투쟁 교육을 받고, 평양과 서울에서 활동하다 일제 경찰에 체포됐습니다.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는 동안에도 그의 신념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홍 선생은 일제 경찰의 심문에서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독립운동 사실을 당당히 밝혔습니다.
해방 뒤, 홍 선생은 수의사 자격을 취득해 진천군청에 근무했습니다.
그러던 중 1948년 충북 진천군 이월면에서 발생한 시국 사건에 연루돼 징역 4년을 선고받고 청주형무소에 수감됐습니다.
1953년에 출소를 앞두고 있었지만, 1950년에 6·25 전쟁이 발발하저 이승만 정권은 예비검속자와 보도연맹원과 정치범들을 재판도 없이 집단 처형하기 시작했습니다.
'형무소 재소자들이 인민군에 협조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홍가륵 선생은 그해 7월, 충북 청주시 낭성면 도장골로 끌려가 100여 명의 민간인과 함께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총살됐습니다.
그의 나이 37세였습니다.
2009년, 국가보훈처는 홍가륵 선생의 항일투쟁을 인정해 독립유공자 애족장을 추서했습니다.
이듬해 진실화해위원회도 홍 선생이 이승만 정권 하 민간인 학살의 희생자임을 공식 확인하고, 유해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충북 청주 도장골에 대한 유해 발굴을 권고했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 아무 조치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홍 선생이 묻힌 자리에는 집중호우 피해를 막기 위한 수해 방지 시설이 들어섰습니다.
시설을 설치하기 위해 청주시는 벌채 공사를 허가했고, 충청북도는 사방댐을 조성했습니다.
해방된 나라의 총탄에 쓰러진 그의 무덤마저 지워진 겁니다.
수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죽어간 학살터에는, 이제 무성하게 자란 잡초 사이로 '청주형무소 사건 희생지'라는 작은 간판만 남아 있습니다.

홍가륵 선생의 아들 홍우영 씨는 "이제는 유해를 찾을 수 있다고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고 한탄했습니다.
다만 "아무 때라도 모여서, 찾아가서 인사라도 드릴만한 장소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 광복 80년인데… '학살 피해 독립운동가' 실태 조사 요원
광복 80년을 맞았지만, 해방 이후 국가 폭력에 희생된 독립운동가들의 구체적인 실태는 여전히 제대로 파악조차 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보도연맹 등 시국 사건에 연루돼 희생된 일부 독립운동가는 공적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고, 후손들은 나라로부터 감시당했습니다.
부모가 독립운동을 했더라도 연좌제 우려로 자녀에게 숨기기도 했습니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항일 운동에 모든 걸 바쳤지만, 조국으로부터 희생당한 이들을 위해 이제라도 합당한 예우를 갖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박만순 충북역사문화연대 대표는 "자식들조차 우리 아버지가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한 훌륭한 독립운동가라는 사실 자체도 모른 채 살아왔다"면서 "관련 실태 조사와 공식적인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관련기사] 독립운동 앞장섰는데…국가 폭력에 희생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298881)
촬영기자 김성은, 그래픽 조은수
-
-
이자현 기자 interest@kbs.co.kr
이자현 기자의 기사 모음
-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
좋아요
0
-
응원해요
0
-
후속 원해요
0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