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리스킹이건 디커플링이건, 우리는 이미 괴롭다

입력 2023.05.28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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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적 일군 대한민국 경제, 그러나 미래는 복합 위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한국 산업정책의 상징입니다. 1961년에 82달러에 불과하던 1인당 국민소득이 이제 3만 3천 달러에 달합니다. 60여 년 만에 400배가 됐습니다. 정부 주도 경제성장의 성과이고, 그 상징이 5개년 계획입니다.

다만 성공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앞으로의 성과는 지금부터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지난 목요일에 열린 '경제개발 5개년 60주년 기념 콘퍼런스'에서도 참석자들은 이 점에 집중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성공의 역사를 지속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문제는 지금 여건이 좋지 않다는 점입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조동철 KDI 원장은 물론 전직 경제관련 장관 등 참석자들은 이구동성 '현 상황은 복합위기'라고 진단했습니다. 이유는 많습니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고금리 상황은 물론 국내 정치, 재정 건전성, 기후 변화, 불균형 발전과 불평등 등 수많은 이유가 언급됐습니다.

그 가운데 추 부총리를 비롯해 가장 많은 사람이 공통적으로 언급한 위기는 단연 '지정학적 불안정성'입니다. 글로벌 패권을 다투는 미·중 분쟁 자체가 걱정이고, 이로 인해 펼쳐지는 공급망 재편과 각국의 보호주의가 연결됩니다. 지금 우리 경제가 겪는 무역 적자와 경기 침체의 가장 큰 요인이 바로 이 지정학적, 혹은 지경학적 분절화라는 이야기입니다.


■ 미·중은 APEC에서도 합의하지 못했다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APEC은 '공동성명' 채택 없이 마쳤습니다. 표면적으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규탄 성명에 중국과 러시아가 반대한 것이 이유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게 아니었더라도 공동성명은 없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미국의 캐서린 타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별도 성명으로 중국을 비판했습니다. 중국과의 회담에서 "경제·무역정책 차원에서 국가 주도의 비시장적 접근이 초래한 중대한 불균형에 대해 다뤄볼 필요가 있다"고 발언했습니다. 국가 보조금을 앞세워 특정 산업을 지원하거나, 정치적 갈등이 있으면 교역을 무기로 삼는 '경제적 강압'을 일삼는다는 지적입니다.

특히 최근 마이크론에 대한 중국의 제재를 비롯한 '중국에서 활동하는 미국 기업들에 대한 중국 정부 조치'에 대한 우려도 표명했습니다.


중국 왕원타오 상무부장은 반대로 미국의 대중국 경제·무역 정책을 비판했습니다. 대중국 고율 관세, 타이완 관련 문제, 중국을 배제하려는 목적의 국제 공조로 의심되는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를 지적했습니다.

"대화가 의미 있었고, 소통 재개 자체를 지지한다"는 메시지는 내놨지만, 내용에서는 첨예하게 대립한 겁니다.

■ 불똥 튄 우리 한국은 "공급망" 말하고 중국은 "반도체" 강조

디트로이트에선 우리도 중국과 회담을 했습니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왕원타오 중국 상무부장과 양자 회담을 했습니다.

회담 내용은 먼저 중국 상무부가 회담 사실을 중국판 카카오톡인 '위챗'을 통해 밝히면서 알려졌습니다.

공급망 안정성 유지를 위한 협력을 강화하는 데 중점을 두기로 했다면서, 콕 집어서 '반도체 공급망에서의 대화와 협력에 합의했다'고 적시했습니다. 최근 중국 당국이 보안 문제를 거론하며 미국 마이크론의 메모리 반도체 구매를 중지한 것을 계기로, 한국의 협조가 필요해진 상황이 반영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옵니다. 마이크론 제품을 안 사는 만큼 한국의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로부터 공급받겠다는 취지 아니겠냐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정부 입장에는 이 반도체에 대한 언급이 없었습니다. 대신 핵심 원자재·부품 수급에 관심을 가져달라, 우리 기업이 예측할 수 있게 사업할 수 있게 해달라는 당부만 담겼습니다.

양국의 입장이 미묘하게 다릅니다. 우리의 곤혹스런 처지가 읽힙니다.

■ 한·미·일 공조 천명하지만, 고민은 사라지지 않는다

미국도 압력을 강화합니다. 이미 '중국이 마이크론을 제재할 때 한국이 중국에 수출을 더해선 안 된다'고 여려 경로로 의사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우리 반도체와 배터리 기업에 '미국 투자'를 요청하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우리 기업의 반도체 판매 자체까지 언급하는 상황입니다.

우리의 입장은 기본적으로는 한미 공조를 더 공고히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일본을 더해 한미일이 공조해서 동아시아 전략을 짜겠다는 복안이 있습니다. 전 정부가 강조했던 '전략적 모호성'이 더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도 깔려 있습니다.

일본이 바로 이 노선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의 협력은 점점 고도화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일본과 한국의 처지가 똑같지는 않다는 데 있습니다. 일본은 내수시장이 충분히 큰 나라입니다. 중국에 대한 수출이 많기는 하지만, 거대한 내수시장이 있기에 중국에 '의존한다'고 할만한 상황은 아닙니다. 게다가 일본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소재, 부품, 장비' 부문에서 탄탄한 수출 흐름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중국 의존도 자체도 높지 않기 때문에 '보복'이라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한국은 내수시장이 일본의 절반도 안 됩니다. 수출에 의지해 60년의 경제 성과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수출에서 현재 중국의 비중은 절대적입니다. 제일 효자 품목인 반도체 수출의 경우 절반 안팎이 중국과 홍콩을 향합니다. 차세대 효자 품목이 되어가는 배터리에서는 소재 광물과 부품에서 중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중국의 자체 경쟁력이 높아지면서 대중국 무역 수지는 나날이 악화되고 있습니다. 월간 무역수지 적자가 계속 이어집니다. 안 그래도 상황은 좋지 않고, 마땅한 대체 수출지를 찾기도 힘든 상황입니다. 그래서 '중국 눈치'를 안 볼 수 없습니다.

추경호 부총리도 국회에서 "중국은 우리의 제1 교역국이고 투자국이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경제협력 파트너이다. 탈중국은 선언한 적도 없고 탈중국을 할 의도도 전혀 없다 하는 말씀을 분명히 드린다.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것이 곧 중국을 벗어나고 중국을 외면하는 것이냐.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라고 발언할 정도입니다.


■ 디리스킹이건 디커플링이건, 우리는 이미 괴롭다

마이크론 제재로 인해 중국의 D램 부족이 실제로 발생한다면, 이를 메꿔줄 수 있는 것은 우리 기업들 뿐입니다. 그냥 달라는 대로 다 줄 수는 있지만, 그러면 미국의 압박이 노골화될 가능성이 큽니다.

미국의 압박은 단순한 말에 그치지 않습니다. 현재 중국에 진출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공장의 현대화는 매년 미국의 허락을 받아야 가능합니다. 미국이 허락하지 않으면 수십 조를 투입한 중국 현지 공장이 '저부가가치 반도체 생산 기지'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기업 경영의 관점에서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에서 열린 G7 회담 뒤, 서방은 디커플링이냐 디리스킹이냐를 놓고 말이 많다고 합니다. 유럽이 '디커플링'은 안 된다, '디리스킹'을 천명해야 한다고 강하게 요구했다는 후문입니다. 수많은 진단이 쏟아집니다.

그러나 한국에는 그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엇이건 간에 이미 유탄을 맞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황 전개를 이 두 강대국의 손에 맡겨두는 한 우리의 곤혹스러운 처지가 개선되기는 쉽지 않을 전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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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리스킹이건 디커플링이건, 우리는 이미 괴롭다
    • 입력 2023-05-28 08:0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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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적 일군 대한민국 경제, 그러나 미래는 복합 위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한국 산업정책의 상징입니다. 1961년에 82달러에 불과하던 1인당 국민소득이 이제 3만 3천 달러에 달합니다. 60여 년 만에 400배가 됐습니다. 정부 주도 경제성장의 성과이고, 그 상징이 5개년 계획입니다.

다만 성공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앞으로의 성과는 지금부터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지난 목요일에 열린 '경제개발 5개년 60주년 기념 콘퍼런스'에서도 참석자들은 이 점에 집중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성공의 역사를 지속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문제는 지금 여건이 좋지 않다는 점입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조동철 KDI 원장은 물론 전직 경제관련 장관 등 참석자들은 이구동성 '현 상황은 복합위기'라고 진단했습니다. 이유는 많습니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고금리 상황은 물론 국내 정치, 재정 건전성, 기후 변화, 불균형 발전과 불평등 등 수많은 이유가 언급됐습니다.

그 가운데 추 부총리를 비롯해 가장 많은 사람이 공통적으로 언급한 위기는 단연 '지정학적 불안정성'입니다. 글로벌 패권을 다투는 미·중 분쟁 자체가 걱정이고, 이로 인해 펼쳐지는 공급망 재편과 각국의 보호주의가 연결됩니다. 지금 우리 경제가 겪는 무역 적자와 경기 침체의 가장 큰 요인이 바로 이 지정학적, 혹은 지경학적 분절화라는 이야기입니다.


■ 미·중은 APEC에서도 합의하지 못했다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APEC은 '공동성명' 채택 없이 마쳤습니다. 표면적으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규탄 성명에 중국과 러시아가 반대한 것이 이유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게 아니었더라도 공동성명은 없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미국의 캐서린 타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별도 성명으로 중국을 비판했습니다. 중국과의 회담에서 "경제·무역정책 차원에서 국가 주도의 비시장적 접근이 초래한 중대한 불균형에 대해 다뤄볼 필요가 있다"고 발언했습니다. 국가 보조금을 앞세워 특정 산업을 지원하거나, 정치적 갈등이 있으면 교역을 무기로 삼는 '경제적 강압'을 일삼는다는 지적입니다.

특히 최근 마이크론에 대한 중국의 제재를 비롯한 '중국에서 활동하는 미국 기업들에 대한 중국 정부 조치'에 대한 우려도 표명했습니다.


중국 왕원타오 상무부장은 반대로 미국의 대중국 경제·무역 정책을 비판했습니다. 대중국 고율 관세, 타이완 관련 문제, 중국을 배제하려는 목적의 국제 공조로 의심되는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를 지적했습니다.

"대화가 의미 있었고, 소통 재개 자체를 지지한다"는 메시지는 내놨지만, 내용에서는 첨예하게 대립한 겁니다.

■ 불똥 튄 우리 한국은 "공급망" 말하고 중국은 "반도체" 강조

디트로이트에선 우리도 중국과 회담을 했습니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왕원타오 중국 상무부장과 양자 회담을 했습니다.

회담 내용은 먼저 중국 상무부가 회담 사실을 중국판 카카오톡인 '위챗'을 통해 밝히면서 알려졌습니다.

공급망 안정성 유지를 위한 협력을 강화하는 데 중점을 두기로 했다면서, 콕 집어서 '반도체 공급망에서의 대화와 협력에 합의했다'고 적시했습니다. 최근 중국 당국이 보안 문제를 거론하며 미국 마이크론의 메모리 반도체 구매를 중지한 것을 계기로, 한국의 협조가 필요해진 상황이 반영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옵니다. 마이크론 제품을 안 사는 만큼 한국의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로부터 공급받겠다는 취지 아니겠냐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정부 입장에는 이 반도체에 대한 언급이 없었습니다. 대신 핵심 원자재·부품 수급에 관심을 가져달라, 우리 기업이 예측할 수 있게 사업할 수 있게 해달라는 당부만 담겼습니다.

양국의 입장이 미묘하게 다릅니다. 우리의 곤혹스런 처지가 읽힙니다.

■ 한·미·일 공조 천명하지만, 고민은 사라지지 않는다

미국도 압력을 강화합니다. 이미 '중국이 마이크론을 제재할 때 한국이 중국에 수출을 더해선 안 된다'고 여려 경로로 의사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우리 반도체와 배터리 기업에 '미국 투자'를 요청하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우리 기업의 반도체 판매 자체까지 언급하는 상황입니다.

우리의 입장은 기본적으로는 한미 공조를 더 공고히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일본을 더해 한미일이 공조해서 동아시아 전략을 짜겠다는 복안이 있습니다. 전 정부가 강조했던 '전략적 모호성'이 더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도 깔려 있습니다.

일본이 바로 이 노선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의 협력은 점점 고도화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일본과 한국의 처지가 똑같지는 않다는 데 있습니다. 일본은 내수시장이 충분히 큰 나라입니다. 중국에 대한 수출이 많기는 하지만, 거대한 내수시장이 있기에 중국에 '의존한다'고 할만한 상황은 아닙니다. 게다가 일본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소재, 부품, 장비' 부문에서 탄탄한 수출 흐름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중국 의존도 자체도 높지 않기 때문에 '보복'이라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한국은 내수시장이 일본의 절반도 안 됩니다. 수출에 의지해 60년의 경제 성과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수출에서 현재 중국의 비중은 절대적입니다. 제일 효자 품목인 반도체 수출의 경우 절반 안팎이 중국과 홍콩을 향합니다. 차세대 효자 품목이 되어가는 배터리에서는 소재 광물과 부품에서 중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중국의 자체 경쟁력이 높아지면서 대중국 무역 수지는 나날이 악화되고 있습니다. 월간 무역수지 적자가 계속 이어집니다. 안 그래도 상황은 좋지 않고, 마땅한 대체 수출지를 찾기도 힘든 상황입니다. 그래서 '중국 눈치'를 안 볼 수 없습니다.

추경호 부총리도 국회에서 "중국은 우리의 제1 교역국이고 투자국이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경제협력 파트너이다. 탈중국은 선언한 적도 없고 탈중국을 할 의도도 전혀 없다 하는 말씀을 분명히 드린다.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것이 곧 중국을 벗어나고 중국을 외면하는 것이냐.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라고 발언할 정도입니다.


■ 디리스킹이건 디커플링이건, 우리는 이미 괴롭다

마이크론 제재로 인해 중국의 D램 부족이 실제로 발생한다면, 이를 메꿔줄 수 있는 것은 우리 기업들 뿐입니다. 그냥 달라는 대로 다 줄 수는 있지만, 그러면 미국의 압박이 노골화될 가능성이 큽니다.

미국의 압박은 단순한 말에 그치지 않습니다. 현재 중국에 진출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공장의 현대화는 매년 미국의 허락을 받아야 가능합니다. 미국이 허락하지 않으면 수십 조를 투입한 중국 현지 공장이 '저부가가치 반도체 생산 기지'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기업 경영의 관점에서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에서 열린 G7 회담 뒤, 서방은 디커플링이냐 디리스킹이냐를 놓고 말이 많다고 합니다. 유럽이 '디커플링'은 안 된다, '디리스킹'을 천명해야 한다고 강하게 요구했다는 후문입니다. 수많은 진단이 쏟아집니다.

그러나 한국에는 그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엇이건 간에 이미 유탄을 맞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황 전개를 이 두 강대국의 손에 맡겨두는 한 우리의 곤혹스러운 처지가 개선되기는 쉽지 않을 전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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