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왕궁 경주 ‘월성’…건물 터·유물 발굴
입력 2015.03.18 (21:39)
수정 2015.03.18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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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경주 월성은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 800년 넘게 신라의 왕궁이 있었던 곳인데요.
월성의 정밀조사에 앞서 행해진 첫 시굴조사부터 바로 대규모 건물터와 다량의 유물이 발굴돼, 비상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정혜미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작은 돌들이 가지런히 줄지어 있고 곳곳에는 커다란 초석이 자리 잡았습니다.
통일신라 시대 때 집을 지으려고 기초를 쌓은 흔적입니다.
서기 101년, 신라 파사왕 때 궁궐로 지어져 834년 동안 신라왕궁이었던 월성의 모습이 처음으로 드러났습니다.
중심부에서는 건물터 6곳과 담장, 배수로도 발견됐습니다.
가장 큰 건물은 길이가 28미터, 폭이 7.1미터로 면적은 2백제곱미터에 이릅니다.
<인터뷰> 어창선(경주 월성 조사단) : "월성 조사를 봤을 때 현재 건물지와 유물들을 비교하면 통일신라 시대 중에서 가장 마지막 단계의 주요 건물로 활용되지 않았을까."
특히 건물터 밑에서는 연꽃 모양이 새겨진 기와와 음각 기호가 그려진 토기 등 신라시대 유물 수 만점도 출토됐습니다.
대부분 생활용품이나 건축물에 활용됐던 것입니다.
<인터뷰> 심영섭(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소장) : "(월성이) 왕궁터였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유적이나 유물들이 아마 밑에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경주 월성 주변에서 간헐적인 조사는 있었지만 이렇게 내부를 본격적으로 조사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연구소는 오는 20일에 문화재 위원회 승인을 거친 뒤, 정밀 발굴 조사에 본격적으로 들어갈 예정입니다.
KBS 뉴스 정혜미입니다.
경주 월성은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 800년 넘게 신라의 왕궁이 있었던 곳인데요.
월성의 정밀조사에 앞서 행해진 첫 시굴조사부터 바로 대규모 건물터와 다량의 유물이 발굴돼, 비상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정혜미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작은 돌들이 가지런히 줄지어 있고 곳곳에는 커다란 초석이 자리 잡았습니다.
통일신라 시대 때 집을 지으려고 기초를 쌓은 흔적입니다.
서기 101년, 신라 파사왕 때 궁궐로 지어져 834년 동안 신라왕궁이었던 월성의 모습이 처음으로 드러났습니다.
중심부에서는 건물터 6곳과 담장, 배수로도 발견됐습니다.
가장 큰 건물은 길이가 28미터, 폭이 7.1미터로 면적은 2백제곱미터에 이릅니다.
<인터뷰> 어창선(경주 월성 조사단) : "월성 조사를 봤을 때 현재 건물지와 유물들을 비교하면 통일신라 시대 중에서 가장 마지막 단계의 주요 건물로 활용되지 않았을까."
특히 건물터 밑에서는 연꽃 모양이 새겨진 기와와 음각 기호가 그려진 토기 등 신라시대 유물 수 만점도 출토됐습니다.
대부분 생활용품이나 건축물에 활용됐던 것입니다.
<인터뷰> 심영섭(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소장) : "(월성이) 왕궁터였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유적이나 유물들이 아마 밑에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경주 월성 주변에서 간헐적인 조사는 있었지만 이렇게 내부를 본격적으로 조사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연구소는 오는 20일에 문화재 위원회 승인을 거친 뒤, 정밀 발굴 조사에 본격적으로 들어갈 예정입니다.
KBS 뉴스 정혜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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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왕궁 경주 ‘월성’…건물 터·유물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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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5-03-18 21:39:58
- 수정2015-03-18 22:2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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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경주 월성은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 800년 넘게 신라의 왕궁이 있었던 곳인데요.
월성의 정밀조사에 앞서 행해진 첫 시굴조사부터 바로 대규모 건물터와 다량의 유물이 발굴돼, 비상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정혜미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작은 돌들이 가지런히 줄지어 있고 곳곳에는 커다란 초석이 자리 잡았습니다.
통일신라 시대 때 집을 지으려고 기초를 쌓은 흔적입니다.
서기 101년, 신라 파사왕 때 궁궐로 지어져 834년 동안 신라왕궁이었던 월성의 모습이 처음으로 드러났습니다.
중심부에서는 건물터 6곳과 담장, 배수로도 발견됐습니다.
가장 큰 건물은 길이가 28미터, 폭이 7.1미터로 면적은 2백제곱미터에 이릅니다.
<인터뷰> 어창선(경주 월성 조사단) : "월성 조사를 봤을 때 현재 건물지와 유물들을 비교하면 통일신라 시대 중에서 가장 마지막 단계의 주요 건물로 활용되지 않았을까."
특히 건물터 밑에서는 연꽃 모양이 새겨진 기와와 음각 기호가 그려진 토기 등 신라시대 유물 수 만점도 출토됐습니다.
대부분 생활용품이나 건축물에 활용됐던 것입니다.
<인터뷰> 심영섭(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소장) : "(월성이) 왕궁터였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유적이나 유물들이 아마 밑에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경주 월성 주변에서 간헐적인 조사는 있었지만 이렇게 내부를 본격적으로 조사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연구소는 오는 20일에 문화재 위원회 승인을 거친 뒤, 정밀 발굴 조사에 본격적으로 들어갈 예정입니다.
KBS 뉴스 정혜미입니다.
경주 월성은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 800년 넘게 신라의 왕궁이 있었던 곳인데요.
월성의 정밀조사에 앞서 행해진 첫 시굴조사부터 바로 대규모 건물터와 다량의 유물이 발굴돼, 비상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정혜미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작은 돌들이 가지런히 줄지어 있고 곳곳에는 커다란 초석이 자리 잡았습니다.
통일신라 시대 때 집을 지으려고 기초를 쌓은 흔적입니다.
서기 101년, 신라 파사왕 때 궁궐로 지어져 834년 동안 신라왕궁이었던 월성의 모습이 처음으로 드러났습니다.
중심부에서는 건물터 6곳과 담장, 배수로도 발견됐습니다.
가장 큰 건물은 길이가 28미터, 폭이 7.1미터로 면적은 2백제곱미터에 이릅니다.
<인터뷰> 어창선(경주 월성 조사단) : "월성 조사를 봤을 때 현재 건물지와 유물들을 비교하면 통일신라 시대 중에서 가장 마지막 단계의 주요 건물로 활용되지 않았을까."
특히 건물터 밑에서는 연꽃 모양이 새겨진 기와와 음각 기호가 그려진 토기 등 신라시대 유물 수 만점도 출토됐습니다.
대부분 생활용품이나 건축물에 활용됐던 것입니다.
<인터뷰> 심영섭(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소장) : "(월성이) 왕궁터였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유적이나 유물들이 아마 밑에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경주 월성 주변에서 간헐적인 조사는 있었지만 이렇게 내부를 본격적으로 조사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연구소는 오는 20일에 문화재 위원회 승인을 거친 뒤, 정밀 발굴 조사에 본격적으로 들어갈 예정입니다.
KBS 뉴스 정혜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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