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교과서에 북극곰은 이제 그만 등장했으면 합니다”

입력 2021.03.05 (08:00) 수정 2021.03.08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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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통합과학> 교과서에 실린 북극곰 사진 <고등학교 통합과학> 교과서에 실린 북극곰 사진

■ 북극곰은 기후변화의 포스터?

KBS 교과서 자문단의 김추령 선생님은 이젠 북극곰 사진이 교과서에 그만 등장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기후위기로 '인류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다는 암울한 경고가 나오는 지금, 북극곰 사진은 "내 문제가 아니야" "멀리 북극의 일일 거야"라는 식으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본질을 흐릴 수 있다는 겁니다. 또 우리에게 닥친 절박함이나 시급함을 희화화시킬 수도 있다고 김 교사는 지적합니다.

실제 1990년대 교과서부터 살펴보니 북극곰은 거의 30년째 다양한 사진과 삽화로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북극의 환경이 빠르게 변하면서, 북극곰의 멸종이 가까워진 것은 맞습니다. 2008년 북극곰은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됐는데요.

그러나 '기후변화=북극곰'이란 틀에 박힌 이미지가 재생산되면서 해외에선 북극곰이 ' 기후변화의 포스터용'(poster child of climate change)으로 전락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연관기사]“30년 내내 북극곰 사진만”…교과서 이대로 괜찮나?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130641

■삶을 위협하는 기후, 교과서는 어떻게 변해왔을까?

 촬영 협조: 한국 교과서연구재단 촬영 협조: 한국 교과서연구재단

지난여름 관측 이후 가장 길었던 54일의 장마와 강력한 태풍 4개를 겪었습니다. 태풍과 집중호우로 인한 인명피해는 46명, 재산피해도 1조 2,585억 원으로 최근 10년 동안의 평균보다 모두 3배 이상 많았습니다. 기후위기는 해마다 극한 수준의 재난을 몰고 와 모두의 삶을 위협하고 있는데요. 교육현장은 어떻게 변해왔을까요?

취재진은 분석 교과서의 범위를 1990년대까지 확대해 보기로 했습니다. 30년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 기후라는 개념이 어떻게 변해왔고, 2021년 현재 교과서는 얼마나 진화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1990년대 교과서, 지구온난화 개념 '첫 등장'

1990년대 <고등학교 공통사회>에서 반가운 대목을 발견했습니다. " 지구 온도가 높아지면 빙하가 녹아내려 세계 여러 나라가 물에 잠기고 큰 재앙이 닥칠지 모른다"고 적혀 있었는데요. '지구 온난화'의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겁니다.

 1990년대에 발행된 고등학교 공통사회 교과서 1990년대에 발행된 고등학교 공통사회 교과서

교과서 오른쪽에는 '자연은 인간의 도구인가?'라는 설명과 함께 채찍을 휘두르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1990년대는 경제 성장이 한창이던 시절이었죠. 다양한 환경 문제들이 등장하고 지구 온난화라는 개념에 대해도 막 접하기 시작한 때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그때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알았다면', 저렇게 채찍질을 계속하지 않았을 텐데요.

 1990년대 중학교 사회 교과서 1990년대 중학교 사회 교과서
비슷한 시기 <중학교 사회3> 교과서에서도 온실효과와 기후변화에 대한 부분이 등장합니다.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량이 늘어 온실효과가 가속화되고 다음 세기말에는 지구의 평균기온이 2.5~5.5℃ 높아질 것"이라고 적혀있습니다. 1990년대였기 때문에 '이번 세기'가 아닌, '다음 세기'라고 표현돼있습니다. 또 "아직은 기후변화에 대한 많은 부분이 불확실한 상태지만 잠재적 재난에 대비해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교과서를 보니 기후변화의 개념이 초창기에는 어떻게 서술됐는지 감이 잡힙니다. 전 지구적으로 온난화에 대한 경각심이 일기 시작한 것은 1988년 '기후변화에 대한 정부 간 위원회'(IPCC)가 만들어진 뒤부터였습니다.

1990년에 IPCC의 첫 보고서가 나오면서 인간이 배출한 온실가스에 의해 기후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 수면 위로 드러났는데요. 교과서에 '아직 기후변화에 불확실한 부분이 많다'는 언급은 바로 이 시기의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2000년부터 가속화된 기후변화...하지만 교과서 변경은 '느림보'


2000년대 들어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2002년 '루사', 2003년 '매미' 같은 슈퍼태풍이 찾아오면서 기후변화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될 때였습니다. 2000년대 교과서를 펼치면서 내심 1990년대보다 얼마나 더 나아갔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습니다.

<고등학교 사회>에는 지구 온난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고 열대림의 파괴를 지구 온난화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반가운 이름도 보입니다. IPCC의 보고서를 소개하며 이상기후 변동과 해수면 상승, 농작물 재배 한계선의 북상 등을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또 우리나라는 이산화탄소 증가율이 매우 높아 국제적으로 감축 압력을 받고 있다는 내용도 보입니다.

그런데 교과서의 발행 시기가 2000년대인 것을 고려하면, 이미 1990년에 나온 보고서를 10년이 훨씬 지난 뒤에야 소개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10년 동안 엄청난 변화가 있었을 텐데도 말이죠. 실제 1995년 IPCC의 2차 보고서가 나왔고, 1997년에는 교토 의정서가 채택돼 전 세계 정상들이 온실가스 감축을 약속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급변하는 흐름을 2000년대 교과서는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교과서 자문단 김추령 선생님은 "기후위기가 가속화되고 있는 속도와 비교해 교육과정 개정은 너무 느리고 보수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이수종 선생님도 "교과서는 자꾸 과학을 가치 중립적으로 다루려는 경향이 있는데 기후변화의 경우 사회, 정치, 경제적인 영향을 다양한 관점에서 가르쳐야 한다"며 "교과서 개정까지는 아니더라도 매년 출판사에서 수정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북극'과 '투발루'에 집착하는 2010년대 교과서


2010년대 들어선 기후위기로 큰 피해를 보는 나라들이 집중 조명되기 시작했습니다. <중학교 사회> 교과서에는 알래스카의 섬과 투발루, 방글라데시 등을 사례로 다루고 있었는데요. 아직도 우리와는 먼 나라의 얘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당시를 돌이켜보면 꼭 교과서뿐이 아니라 북극이나 투발루 관련 환경 다큐멘터리 등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나왔습니다. 태평양 섬나라들의 해수면 상승, 북극 얼음의 감소, 영구동토층 붕괴 같은 눈에 보이는 대상과 문제들을 주로 다뤘습니다. 아직은 위기의식이 크지 않았고 먼 나라의 북극곰이나 이누이트, 투발루 주민들의 얘기로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2020년대를 사는 지금은 어떨까요? 이제는 기후위기를 체감하고 '지금 즉시'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사람이 많이 늘었습니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여러 나라가 2050년엔 탄소의 실질 배출량을 '0'으로 줄이겠다며, 탄소 중립을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교과서는 기후위기를 막기 위한 대안으로 시대에 상관없이, 초중고 모든 학년과 모든 과목에서 천편일률적으로 '개인'의 실천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현직 교사들로 구성된 교과서 자문단이 지적한 가장 큰 문제이기도 합니다. 기후위기 시대, 교육 문제를 다룬 [취재 후] 다음 편에선 이 부분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연관기사][취재후] ‘삼한칠미’ 시대에 사과와 명태로 기후위기를 체감할까?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130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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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교과서에 북극곰은 이제 그만 등장했으면 합니다”
    • 입력 2021-03-05 08:00:12
    • 수정2021-03-08 15:28:00
    취재후·사건후
 <고등학교 통합과학> 교과서에 실린 북극곰 사진
■ 북극곰은 기후변화의 포스터?

KBS 교과서 자문단의 김추령 선생님은 이젠 북극곰 사진이 교과서에 그만 등장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기후위기로 '인류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다는 암울한 경고가 나오는 지금, 북극곰 사진은 "내 문제가 아니야" "멀리 북극의 일일 거야"라는 식으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본질을 흐릴 수 있다는 겁니다. 또 우리에게 닥친 절박함이나 시급함을 희화화시킬 수도 있다고 김 교사는 지적합니다.

실제 1990년대 교과서부터 살펴보니 북극곰은 거의 30년째 다양한 사진과 삽화로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북극의 환경이 빠르게 변하면서, 북극곰의 멸종이 가까워진 것은 맞습니다. 2008년 북극곰은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됐는데요.

그러나 '기후변화=북극곰'이란 틀에 박힌 이미지가 재생산되면서 해외에선 북극곰이 ' 기후변화의 포스터용'(poster child of climate change)으로 전락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연관기사]“30년 내내 북극곰 사진만”…교과서 이대로 괜찮나?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130641

■삶을 위협하는 기후, 교과서는 어떻게 변해왔을까?

 촬영 협조: 한국 교과서연구재단
지난여름 관측 이후 가장 길었던 54일의 장마와 강력한 태풍 4개를 겪었습니다. 태풍과 집중호우로 인한 인명피해는 46명, 재산피해도 1조 2,585억 원으로 최근 10년 동안의 평균보다 모두 3배 이상 많았습니다. 기후위기는 해마다 극한 수준의 재난을 몰고 와 모두의 삶을 위협하고 있는데요. 교육현장은 어떻게 변해왔을까요?

취재진은 분석 교과서의 범위를 1990년대까지 확대해 보기로 했습니다. 30년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 기후라는 개념이 어떻게 변해왔고, 2021년 현재 교과서는 얼마나 진화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1990년대 교과서, 지구온난화 개념 '첫 등장'

1990년대 <고등학교 공통사회>에서 반가운 대목을 발견했습니다. " 지구 온도가 높아지면 빙하가 녹아내려 세계 여러 나라가 물에 잠기고 큰 재앙이 닥칠지 모른다"고 적혀 있었는데요. '지구 온난화'의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겁니다.

 1990년대에 발행된 고등학교 공통사회 교과서
교과서 오른쪽에는 '자연은 인간의 도구인가?'라는 설명과 함께 채찍을 휘두르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1990년대는 경제 성장이 한창이던 시절이었죠. 다양한 환경 문제들이 등장하고 지구 온난화라는 개념에 대해도 막 접하기 시작한 때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그때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알았다면', 저렇게 채찍질을 계속하지 않았을 텐데요.

 1990년대 중학교 사회 교과서 비슷한 시기 <중학교 사회3> 교과서에서도 온실효과와 기후변화에 대한 부분이 등장합니다.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량이 늘어 온실효과가 가속화되고 다음 세기말에는 지구의 평균기온이 2.5~5.5℃ 높아질 것"이라고 적혀있습니다. 1990년대였기 때문에 '이번 세기'가 아닌, '다음 세기'라고 표현돼있습니다. 또 "아직은 기후변화에 대한 많은 부분이 불확실한 상태지만 잠재적 재난에 대비해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교과서를 보니 기후변화의 개념이 초창기에는 어떻게 서술됐는지 감이 잡힙니다. 전 지구적으로 온난화에 대한 경각심이 일기 시작한 것은 1988년 '기후변화에 대한 정부 간 위원회'(IPCC)가 만들어진 뒤부터였습니다.

1990년에 IPCC의 첫 보고서가 나오면서 인간이 배출한 온실가스에 의해 기후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 수면 위로 드러났는데요. 교과서에 '아직 기후변화에 불확실한 부분이 많다'는 언급은 바로 이 시기의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2000년부터 가속화된 기후변화...하지만 교과서 변경은 '느림보'


2000년대 들어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2002년 '루사', 2003년 '매미' 같은 슈퍼태풍이 찾아오면서 기후변화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될 때였습니다. 2000년대 교과서를 펼치면서 내심 1990년대보다 얼마나 더 나아갔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습니다.

<고등학교 사회>에는 지구 온난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고 열대림의 파괴를 지구 온난화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반가운 이름도 보입니다. IPCC의 보고서를 소개하며 이상기후 변동과 해수면 상승, 농작물 재배 한계선의 북상 등을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또 우리나라는 이산화탄소 증가율이 매우 높아 국제적으로 감축 압력을 받고 있다는 내용도 보입니다.

그런데 교과서의 발행 시기가 2000년대인 것을 고려하면, 이미 1990년에 나온 보고서를 10년이 훨씬 지난 뒤에야 소개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10년 동안 엄청난 변화가 있었을 텐데도 말이죠. 실제 1995년 IPCC의 2차 보고서가 나왔고, 1997년에는 교토 의정서가 채택돼 전 세계 정상들이 온실가스 감축을 약속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급변하는 흐름을 2000년대 교과서는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교과서 자문단 김추령 선생님은 "기후위기가 가속화되고 있는 속도와 비교해 교육과정 개정은 너무 느리고 보수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이수종 선생님도 "교과서는 자꾸 과학을 가치 중립적으로 다루려는 경향이 있는데 기후변화의 경우 사회, 정치, 경제적인 영향을 다양한 관점에서 가르쳐야 한다"며 "교과서 개정까지는 아니더라도 매년 출판사에서 수정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북극'과 '투발루'에 집착하는 2010년대 교과서


2010년대 들어선 기후위기로 큰 피해를 보는 나라들이 집중 조명되기 시작했습니다. <중학교 사회> 교과서에는 알래스카의 섬과 투발루, 방글라데시 등을 사례로 다루고 있었는데요. 아직도 우리와는 먼 나라의 얘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당시를 돌이켜보면 꼭 교과서뿐이 아니라 북극이나 투발루 관련 환경 다큐멘터리 등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나왔습니다. 태평양 섬나라들의 해수면 상승, 북극 얼음의 감소, 영구동토층 붕괴 같은 눈에 보이는 대상과 문제들을 주로 다뤘습니다. 아직은 위기의식이 크지 않았고 먼 나라의 북극곰이나 이누이트, 투발루 주민들의 얘기로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2020년대를 사는 지금은 어떨까요? 이제는 기후위기를 체감하고 '지금 즉시'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사람이 많이 늘었습니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여러 나라가 2050년엔 탄소의 실질 배출량을 '0'으로 줄이겠다며, 탄소 중립을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교과서는 기후위기를 막기 위한 대안으로 시대에 상관없이, 초중고 모든 학년과 모든 과목에서 천편일률적으로 '개인'의 실천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현직 교사들로 구성된 교과서 자문단이 지적한 가장 큰 문제이기도 합니다. 기후위기 시대, 교육 문제를 다룬 [취재 후] 다음 편에선 이 부분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연관기사][취재후] ‘삼한칠미’ 시대에 사과와 명태로 기후위기를 체감할까?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130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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