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70년기획]③ “내 나이가 구순 넘었는데, 오백 년 살고 싶습니다”

입력 2020.09.30 (14:02) 수정 2021.02.10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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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치하에서는 옛것은 못하게 하잖아..." 소리가 좋아서 월남

이북5도 무형문화재 제2호 '산염불', '난봉가' 보유자인 박기종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고향은 황해도 벽성군 고산면 원평리 임정동 436번지입니다. 고향을 떠난 뒤 70여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고향 집 번지수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동네에서 부르던 판소리가 좋아 평양에 가서 배울 만큼 판소리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습니다. 일제 치하에 유년 시절을 보내고 해방의 기쁨도 잠시... 공산 정권이 들어선 38선 이북에서는 '옛것'인 판소리를 더는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평양 새 거리는 옛날 노래를 배우면 안 되는 세상이었어요. 옛 풍습, 옛 습관, 옛 문화, 옛 생활 이 네 가지 종류를 하는 사람은 무조건 벌을 받을 때였어요."

배운 것이라고는 소리밖에 없었던 박 할아버지는 자유롭게 판소리를 부를 수 있는 남쪽으로 가야겠다는 말을 하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떠난 지 71년... 잠시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긴 뒤 그 잠시가 70년이 넘는 세월이 되었습니다.


■ 잠시만 남한에 피해있다 온다는 게 70년

'얼마 동안만 남한에 가 고생하면 다시 38선이 열려서 고향을 갈 수 있겠지.' 할아버지는 그 당시 고향을 떠난 다른 사람들처럼 곧 고향에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집안 재산을 정리해 남한에서 얼마간 지낼 돈까지 마련해준 가족들도 이것이 마지막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오빠가 외아들인데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어. 어머니 아버지가 벌써 60이 다 되셨는데 오래 있으면 안돼." 6살 아래 동생이 오빠를 떠나보내는 길에 나지막이 했던 말 한마디가 명절만 되면 귓가에 맴돕니다.

고향 땅 황해도에서 가장 가까운 곳 연평도. 바다 건너 저편이 고향 땅이라고 생각하며 행여 북에 있는 가족에게 마음이라도 전해질까 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가보기도 했습니다.

"연평도에 가봐야 한마디로 도루묵이죠. 속만 상하고 오는 거예요. 눈물만 흘리고 오는 거예요." 바다 건너 고향이 보일 것 같기도 하지만 이제는 그것조차 사치라고 생각해 속상한 마음에 발길을 끊었다고 푸념했습니다

부모님의 환갑도 보지 못하고 떠난 고향. 이제는 기억 속의 부모님보다 거울 속의 할아버지 자신이 더 늙어버렸습니다.


■ "아는 게 소리뿐이잖아요"...고향이 그리울 때마다 하는 소리

"노래를 하다 보면 '이 노래는 고향에서 어느 때 언제 누구하고 노래하고 이런 일이 있었지'까지 생각을 하거든요." 혈혈단신으로 남한으로 내려온 뒤 고향이 그리울 때면 고향에서 부르던 판소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한과 서글픔이 배어 있는 서도소리를 부르며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습니다.

"(노래에) 내 고향이 묻어 있으니까. 내 생활이 묻어 있으니까. 그 노래를 부르면서 내가 성장했으니까. 그게 나의 일부분이다. 그래서 난 그 소리를 안부를 수가 없다. 또 아는 게 그것뿐이잖아요."


■ 가족들을 위해 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저는 부모 형제를 위해서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부모님을 위해서 요샛말로 아이스크림 한번 사 드린 일도 없어요."

가족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홀로 고향을 떠난 자책으로 이어집니다. 혹시나 북에 남은 가족들이 힘든 삶은 살았다면 모든 것이 고향을 떠난 자신 잘못 같아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해줄 수만 있다면 북에 남은 가족 친지에서 다해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현실에 먹먹해집니다.

"인생이 한번 태어나면 한 오백 년씩 살았으면 좋겠어요. 좀 길게 살다 보면 언젠가 통일이 되리라고 희망이라도 품어보죠. 너무 짧게 몇십 년 살다 가니까 한탄만 남기고…." 올해 94세인 박기종 할아버지가 500년을 살고 싶다고 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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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9-30 14:01:59
    • 수정2021-02-10 08:2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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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치하에서는 옛것은 못하게 하잖아..." 소리가 좋아서 월남

이북5도 무형문화재 제2호 '산염불', '난봉가' 보유자인 박기종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고향은 황해도 벽성군 고산면 원평리 임정동 436번지입니다. 고향을 떠난 뒤 70여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고향 집 번지수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동네에서 부르던 판소리가 좋아 평양에 가서 배울 만큼 판소리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습니다. 일제 치하에 유년 시절을 보내고 해방의 기쁨도 잠시... 공산 정권이 들어선 38선 이북에서는 '옛것'인 판소리를 더는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평양 새 거리는 옛날 노래를 배우면 안 되는 세상이었어요. 옛 풍습, 옛 습관, 옛 문화, 옛 생활 이 네 가지 종류를 하는 사람은 무조건 벌을 받을 때였어요."

배운 것이라고는 소리밖에 없었던 박 할아버지는 자유롭게 판소리를 부를 수 있는 남쪽으로 가야겠다는 말을 하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떠난 지 71년... 잠시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긴 뒤 그 잠시가 70년이 넘는 세월이 되었습니다.


■ 잠시만 남한에 피해있다 온다는 게 70년

'얼마 동안만 남한에 가 고생하면 다시 38선이 열려서 고향을 갈 수 있겠지.' 할아버지는 그 당시 고향을 떠난 다른 사람들처럼 곧 고향에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집안 재산을 정리해 남한에서 얼마간 지낼 돈까지 마련해준 가족들도 이것이 마지막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오빠가 외아들인데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어. 어머니 아버지가 벌써 60이 다 되셨는데 오래 있으면 안돼." 6살 아래 동생이 오빠를 떠나보내는 길에 나지막이 했던 말 한마디가 명절만 되면 귓가에 맴돕니다.

고향 땅 황해도에서 가장 가까운 곳 연평도. 바다 건너 저편이 고향 땅이라고 생각하며 행여 북에 있는 가족에게 마음이라도 전해질까 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가보기도 했습니다.

"연평도에 가봐야 한마디로 도루묵이죠. 속만 상하고 오는 거예요. 눈물만 흘리고 오는 거예요." 바다 건너 고향이 보일 것 같기도 하지만 이제는 그것조차 사치라고 생각해 속상한 마음에 발길을 끊었다고 푸념했습니다

부모님의 환갑도 보지 못하고 떠난 고향. 이제는 기억 속의 부모님보다 거울 속의 할아버지 자신이 더 늙어버렸습니다.


■ "아는 게 소리뿐이잖아요"...고향이 그리울 때마다 하는 소리

"노래를 하다 보면 '이 노래는 고향에서 어느 때 언제 누구하고 노래하고 이런 일이 있었지'까지 생각을 하거든요." 혈혈단신으로 남한으로 내려온 뒤 고향이 그리울 때면 고향에서 부르던 판소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한과 서글픔이 배어 있는 서도소리를 부르며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습니다.

"(노래에) 내 고향이 묻어 있으니까. 내 생활이 묻어 있으니까. 그 노래를 부르면서 내가 성장했으니까. 그게 나의 일부분이다. 그래서 난 그 소리를 안부를 수가 없다. 또 아는 게 그것뿐이잖아요."


■ 가족들을 위해 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저는 부모 형제를 위해서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부모님을 위해서 요샛말로 아이스크림 한번 사 드린 일도 없어요."

가족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홀로 고향을 떠난 자책으로 이어집니다. 혹시나 북에 남은 가족들이 힘든 삶은 살았다면 모든 것이 고향을 떠난 자신 잘못 같아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해줄 수만 있다면 북에 남은 가족 친지에서 다해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현실에 먹먹해집니다.

"인생이 한번 태어나면 한 오백 년씩 살았으면 좋겠어요. 좀 길게 살다 보면 언젠가 통일이 되리라고 희망이라도 품어보죠. 너무 짧게 몇십 년 살다 가니까 한탄만 남기고…." 올해 94세인 박기종 할아버지가 500년을 살고 싶다고 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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