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정부도 헤매는 ‘직장내 괴롭힘’…“우리 소관 아닌데?”

입력 2019.08.21 (17:00) 수정 2019.08.21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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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 7월 16일 많은 직장인들의 기대 속에 시행됐습니다. 직장 내 괴롭힘 행위를 법으로 금지하는 긍정적 효과도 있지만 처벌 규정이 없어 실효성이 없는 등 한계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KBS 이슈팀은 직장 내 괴롭힘의 심각성을 조명하고, 한계를 짚는 기획보도를 준비했습니다.

"집에 애들 데려다줘"…부하 직원 괴롭힌 농식품부 간부

지난 6월 농림축산식품부 감사담당관실에 직장 갑질 피해신고가 접수됐다는 사실을 취재진은 최근 알게 됐습니다. 신고자는 같은 부서 소속 공무원 3명으로, 담당 팀장을 가해자로 지목했습니다. 보수적인 공직 사회에서 '직장 괴롭힘' 신고는 흔치 않은 일입니다. 현재 조사가 진행 중인 가운데 신고자들을 만나 '왜 신고를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유를 들어봤습니다.

신고자들은 해당 팀장이 "9시, 10시쯤에 키즈 카페에 애들이 있으니 자기는 술을 먹고 있는데 애들을 좀 집으로 데리고 가달라"고 하는가 하면, 팀장의 어머님의 재산세 관련 서류에 대리 서명을 부탁하는 등 사적 지시가 빈번했다고 말했습니다. 한 신고자는 부당하다고 생각해 팀장의 '요청'을 거절했지만, 전화를 끊고 나서 마음에 짐이 될 정도로 팀장의 전화는 큰 스트레스였다고 합니다.

또한 무엇보다 팀원들에게 가장 큰 고통이었던 건 업무 과정에서 툭툭 터져 나오는 폭언과 강압적인 업무 지시였다고 합니다. 일터에서 존중받지 못하고, 수치심을 느끼는 상황이 많았다는 겁니다. 신고자 중 한 명은 팀장 A씨의 괴롭힘을 '정서적인 학대'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한 신고자는 "정서적으로 사람을 괴롭히는 것만큼 힘든 게 없는 거 같아요. 바늘로 허벅지를 끊임없이 찌르는 그런 고통을 받는 듯한 느낌. 정말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제가 아플 것 같은 정도"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감사 공무원도 "축적된 사례 부족, 판단 고민돼"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전이었던 6월 말이었지만 신고가 가능했던 건 공무원은 '공무원 행동강령'이 있어 '직장 내 괴롭힘' 행위를 신고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고 이후 두 달째 조사가 진행 중인데 감사 부서는 쉽사리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된 행위가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는지 판단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조사 중인 농림축산식품부 감사담당관실 관계자는 취재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갑질이라는 게 정부 전체적으로 사례가 축적된 것도 부족하고요. 조사는 마무리 단계인데 고민되는 부분도 있어서 법률 자문을 구해봐야 합니다"

직장 내 괴롭힘 행위는 법안에 「①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②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③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로 정의돼 있습니다. 직장 내 괴롭힘 행위를 폭넓게 아우를 수 있도록 한 건데 법안이 구체적이 않아 판단이 쉽지 않습니다.

"노동청 번호 안내해드릴게" vs "노동부에 물어보셔야" 책임 떠넘기기

그래서 일반인들이 직장 내 괴롭힘 행위를 당할 경우 이에 대한 판단을 정부가 어떻게 돕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기자 신분을 숨기고 확인해봤습니다. 먼저 고용노동부 상담센터 1350번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일자리 안정 자금은 1번, 노동 및 산업안전은 2번, 청년 고용 구인구직 상담은 3번…".

직장 내 괴롭힘 관련 상담 항목이 없어 '노동 및 산업안전' 항목을 선택해 상담원과 통화를 해봤습니다. 상담원은 "직장 내 괴롭힘 조건에 대해선 안내가 가능하지만 해당하는 사례가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한다는 판단을 내려드리기는 어렵다"고 안내했습니다. 그러면서 "관할 노동청에 연락처 알려드리겠다"고 말했습니다.

상담원에게서 받은 관할 노동청(서울남부지청)에 다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러자 노동청에선 대뜸 "1350번으로 전화를 걸어달라"고 안내했습니다. 1350번에서 안내를 받아 전화한 것이라고 하자 "거기서 상담해줘야 하는데 걔들은 무조건 관할 지청으로 연락하라고 한다"는 말이 돌아왔습니다.

법만 만들어 놨지 이를 명확히 판단하고 피해자를 지원할 시스템은 만들어 놓지 않은 겁니다.


매뉴얼로 한 권으로 정부 역할은 끝인가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은 법률상 처벌 규정을 만들지 않은 단점도 있지만 괴롭힘 행위를 법으로 엄격히 금지하고 내규로 징계할 근거 역할은 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역할을 하기 위해선 정부 역할이 필수적입니다.

고용노동부가 법 시행에 맞춰 보도 자료를 내고 안내 매뉴얼을 만들었지만, 이걸로 정부의 역할은 끝나지 않습니다. 어떤 행위가 직장 괴롭힘에 해당하는지, 신고 절차가 어떻게 되는지 등 피해자를 지원할 시스템도 함께 만들어야 당초 만든 취지대로 법도 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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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에서 겪은 부당한 대우와 갑질이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는지 상담 및 조언을 받고 싶다면 "직장갑질 119"에 제보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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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정부도 헤매는 ‘직장내 괴롭힘’…“우리 소관 아닌데?”
    • 입력 2019-08-21 17:00:48
    • 수정2019-08-21 17:03:36
    취재후·사건후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 7월 16일 많은 직장인들의 기대 속에 시행됐습니다. 직장 내 괴롭힘 행위를 법으로 금지하는 긍정적 효과도 있지만 처벌 규정이 없어 실효성이 없는 등 한계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KBS 이슈팀은 직장 내 괴롭힘의 심각성을 조명하고, 한계를 짚는 기획보도를 준비했습니다.

"집에 애들 데려다줘"…부하 직원 괴롭힌 농식품부 간부

지난 6월 농림축산식품부 감사담당관실에 직장 갑질 피해신고가 접수됐다는 사실을 취재진은 최근 알게 됐습니다. 신고자는 같은 부서 소속 공무원 3명으로, 담당 팀장을 가해자로 지목했습니다. 보수적인 공직 사회에서 '직장 괴롭힘' 신고는 흔치 않은 일입니다. 현재 조사가 진행 중인 가운데 신고자들을 만나 '왜 신고를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유를 들어봤습니다.

신고자들은 해당 팀장이 "9시, 10시쯤에 키즈 카페에 애들이 있으니 자기는 술을 먹고 있는데 애들을 좀 집으로 데리고 가달라"고 하는가 하면, 팀장의 어머님의 재산세 관련 서류에 대리 서명을 부탁하는 등 사적 지시가 빈번했다고 말했습니다. 한 신고자는 부당하다고 생각해 팀장의 '요청'을 거절했지만, 전화를 끊고 나서 마음에 짐이 될 정도로 팀장의 전화는 큰 스트레스였다고 합니다.

또한 무엇보다 팀원들에게 가장 큰 고통이었던 건 업무 과정에서 툭툭 터져 나오는 폭언과 강압적인 업무 지시였다고 합니다. 일터에서 존중받지 못하고, 수치심을 느끼는 상황이 많았다는 겁니다. 신고자 중 한 명은 팀장 A씨의 괴롭힘을 '정서적인 학대'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한 신고자는 "정서적으로 사람을 괴롭히는 것만큼 힘든 게 없는 거 같아요. 바늘로 허벅지를 끊임없이 찌르는 그런 고통을 받는 듯한 느낌. 정말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제가 아플 것 같은 정도"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감사 공무원도 "축적된 사례 부족, 판단 고민돼"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전이었던 6월 말이었지만 신고가 가능했던 건 공무원은 '공무원 행동강령'이 있어 '직장 내 괴롭힘' 행위를 신고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고 이후 두 달째 조사가 진행 중인데 감사 부서는 쉽사리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된 행위가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는지 판단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조사 중인 농림축산식품부 감사담당관실 관계자는 취재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갑질이라는 게 정부 전체적으로 사례가 축적된 것도 부족하고요. 조사는 마무리 단계인데 고민되는 부분도 있어서 법률 자문을 구해봐야 합니다"

직장 내 괴롭힘 행위는 법안에 「①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②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③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로 정의돼 있습니다. 직장 내 괴롭힘 행위를 폭넓게 아우를 수 있도록 한 건데 법안이 구체적이 않아 판단이 쉽지 않습니다.

"노동청 번호 안내해드릴게" vs "노동부에 물어보셔야" 책임 떠넘기기

그래서 일반인들이 직장 내 괴롭힘 행위를 당할 경우 이에 대한 판단을 정부가 어떻게 돕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기자 신분을 숨기고 확인해봤습니다. 먼저 고용노동부 상담센터 1350번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일자리 안정 자금은 1번, 노동 및 산업안전은 2번, 청년 고용 구인구직 상담은 3번…".

직장 내 괴롭힘 관련 상담 항목이 없어 '노동 및 산업안전' 항목을 선택해 상담원과 통화를 해봤습니다. 상담원은 "직장 내 괴롭힘 조건에 대해선 안내가 가능하지만 해당하는 사례가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한다는 판단을 내려드리기는 어렵다"고 안내했습니다. 그러면서 "관할 노동청에 연락처 알려드리겠다"고 말했습니다.

상담원에게서 받은 관할 노동청(서울남부지청)에 다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러자 노동청에선 대뜸 "1350번으로 전화를 걸어달라"고 안내했습니다. 1350번에서 안내를 받아 전화한 것이라고 하자 "거기서 상담해줘야 하는데 걔들은 무조건 관할 지청으로 연락하라고 한다"는 말이 돌아왔습니다.

법만 만들어 놨지 이를 명확히 판단하고 피해자를 지원할 시스템은 만들어 놓지 않은 겁니다.


매뉴얼로 한 권으로 정부 역할은 끝인가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은 법률상 처벌 규정을 만들지 않은 단점도 있지만 괴롭힘 행위를 법으로 엄격히 금지하고 내규로 징계할 근거 역할은 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역할을 하기 위해선 정부 역할이 필수적입니다.

고용노동부가 법 시행에 맞춰 보도 자료를 내고 안내 매뉴얼을 만들었지만, 이걸로 정부의 역할은 끝나지 않습니다. 어떤 행위가 직장 괴롭힘에 해당하는지, 신고 절차가 어떻게 되는지 등 피해자를 지원할 시스템도 함께 만들어야 당초 만든 취지대로 법도 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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