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카톡은 되고 ‘112’는 안 된다?

입력 2019.08.21 (16:15) 수정 2019.08.21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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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톡 할 시간에 경찰에 신고했겠다?"…112신고 안 한 걸까, 못한 걸까
지난달 9일 배우 강지환 씨가 자신의 집에서 여성 2명을 성폭행·성추행한 혐의로 긴급체포됐습니다.

사건 직후 이 여성들이 피해 사실을 '카톡'으로 지인들에게 알렸다고 전해지면서 논란이 일었습니다.
왜 먼저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느냐, 카톡 할 시간에 신고하는 게 맞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피해자들을 향해 '꽃뱀'이라는 악성 댓글도 달렸습니다.

어떻게 된 건지 저도 궁금했습니다. 상식적으로 휴대전화가 있다면 112신고를 하는 게 먼저였다고 생각했습니다. 112신고를 했는데 전화가 걸리지 않은 건지, 아니면 신고할 생각을 못 했던 건지 알아봐야겠다, '긴급전화' 취재는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 "우리 집은 SKT만 돼…다른 통신사는 잘 안 터질 거야"
피해자들의 변호사를 만나 당시 상황을 들어봤습니다. 사건 당일 피해 여성 외에도 여러 명의 스태프가 강 씨 집에 모여 회식을 겸한 자리를 가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휴대전화가 잘 터지지 않아 강 씨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강 씨는 "여기는 SKT만 잘 터지고, 다른 통신사는 잘 터지지 않는다"라고 답했습니다.

실제 바로 집 뒤편에 산이 있는 강 씨 집 주변에서는 3사 신호가 모두 세게 잡히진 않았습니다. KT 신호는 집 가까이 갈수록 약해졌습니다. 집 내부는 SKT 중계기를 설치해서 해당 통신사의 서비스만 원활하게 됐던 상황이었습니다.

피해 직후 이 여성들은 강 씨가 나가자마자 곧바로 문을 잠그고 먼저 112신고 전화를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전화는 발신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여성들은 이미 전화가 잘 안 터진단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몇 번의 전화를 더 시도한 끝에 다른 방법을 찾게 됩니다.

■ 112 전화 먹통인데 '카톡'이 된 이유는?
통신 상태가 좋지 않았으니 당연히 카톡 서비스도 잘 안 됐을 겁니다. 그런데도 지인들에게 카톡을 보낼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집 안에서 가까스로 비밀번호가 걸려 있지 않은 '개방형 와이파이'를 찾은 겁니다.


피해 여성들이 지인들에게 보낸 카톡 메시지에는 전화가 되지 않는 상황이 잘 드러납니다. 지인에게 현재 위치를 보냈고, 112신고도 부탁합니다. 결국, 피해 여성들을 대신해 지인이 경찰에 신고했고, 위치 추적을 거쳐 경찰이 출동했습니다.

피해 여성 측 국선변호인인 박지훈 변호사는 "피해자들이 상당 시간 갇혀 있는 상태에서 강 씨가 음악을 틀고 문을 두드려 계속 공포를 겪어야 했다며, 사건 직후 112신고가 바로 이뤄져 경찰이 출동했더라면 좀 더 일찍 피해 장소를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 112·119 '긴급전화' 사각지대 있었다


문제는 일반 전화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112, 119 긴급전화는 반드시 걸렸어야 한다는 겁니다. 위급상황에 대비해 긴급전화는 이용하는 통신사 신호가 끊겨도 다른 통신사 주파수를 잡아 전화를 걸게 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KBS 취재 결과 '긴급전화 전환 시스템'을 규정한 현재 통신규격에 사각지대가 있었습니다. 이용하는 통신사 신호가 완전히 끊기지 않고 미약하게라도 잡히면, 타사 망으로 넘어가지 못해 긴급전화 전환 시스템이 아예 작동하지 않는 겁니다.

강 씨 사건 피해 여성들이 이용하는 KT 통신망이 완전히 끊겼다면 주변에 신호가 센 타사 망으로 넘어가 112 긴급전화가 걸렸을 겁니다. 하지만 약한 KT 신호가 잡혔다 끊기기를 반복하며 타사 망으로 전환을 방해했습니다.

■ "위급상황에서 유심을 빼라고? 침이라도 갖고 다니라는 건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통신서비스 상태가 좋지 않은 이른바 '음영지역'에서 긴급전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정부도 이통사·제조사와 함께 긴급 대책 마련에 나섰습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사각지대가 발견된 통신규격을 보완하는 겁니다. 다만 이 규격은 국내에서 사업자들이 임의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이동통신표준화 기구인 3GPP에서 바꿔야 합니다. 통신 전문가들은 국가마다 통신 상황이나 필요성 등이 달라서 동일한 기준을 정하는 게 쉽지 않지만, 통신규격을 바꾸는 것이 사각지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실제 긴급전화 등에 관한 통신규격은 단말기 제조사와도 관련 있는 문제여서 국제적인 기준에 따라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국내 사업자들 간에 만든 규격에 별도 기준을 마련하는 것도 검토 중입니다. 주무 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일정 기준 이하로 신호가 약해져 사실상 통신이 끊긴 것과 같은 상황일 때 타사 망으로 전환되도록 하거나, 단말기 자체 표준을 변경하는 방안 등을 다각적으로 검토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제한된 방송 뉴스에서 이 같은 내용을 모두 소개하지 못하다 보니, 당장 위급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미완적인 방법만을 소개하게 됐습니다. 바로 '유심' 제거입니다.

앞서 설명한 통신규격에는 1) 적합한 기지국이 없을 경우(제한된 서비스 상태) 2) 단말기에 SIM 카드가 없는 경우 어느 상황에서든 긴급통화가 이뤄질 수 있도록 가입한 이통사에 상관없이 가능한 기지국에 접속해야 한다고 돼 있습니다. 실제 유심이 없으면 주변에 가장 센 신호를 잡아 긴급전화가 걸립니다.

하지만 뾰족한 수단이 있어야 제거할 수 있고, 위급 상황에 처했을 때를 고려한다면 '유심 제거'는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이자 임시방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합니다.

■ 5G 속도 경쟁만큼 '음영지역' 줄이는 노력도 필요

지난해 11월 KT 아현 통신구 화재로 유·무선 전화와 인터넷 등 주변 지역의 모든 통신이 마비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70대 여성이 쓰러진 위급 상황에서 119 긴급전화마저 먹통이 됐습니다. 결국, 이 여성은 숨졌는데 유가족들은 긴급전화가 안 돼 구조가 늦어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도 긴급전화 전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화재로 KT망이 먹통이 됐지만 주변에 약한 신호가 남아 있었고, 타사망으로 전환을 방해해 긴급전화 연결이 안 된 겁니다.

세계 최초 5G 상용화를 내세우며 이통사와 제조사들은 홍보에 여념이 없습니다. 하지만 긴급전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사례처럼 여전히 통신서비스가 취약한 이른바 '음영지역'이 남아 있습니다. 5G 속도 경쟁에만 몰두하기보다는 부족한 서비스를 보완하는 노력이 우선입니다.

이번 계기로 긴급전화 시스템 점검에 들어간 정부가 어떤 실효성 있는 대책을 내놓을지도 지켜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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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카톡은 되고 ‘112’는 안 된다?
    • 입력 2019-08-21 16:15:47
    • 수정2019-08-21 16:15:52
    취재후·사건후
■ "카톡 할 시간에 경찰에 신고했겠다?"…112신고 안 한 걸까, 못한 걸까
지난달 9일 배우 강지환 씨가 자신의 집에서 여성 2명을 성폭행·성추행한 혐의로 긴급체포됐습니다.

사건 직후 이 여성들이 피해 사실을 '카톡'으로 지인들에게 알렸다고 전해지면서 논란이 일었습니다.
왜 먼저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느냐, 카톡 할 시간에 신고하는 게 맞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피해자들을 향해 '꽃뱀'이라는 악성 댓글도 달렸습니다.

어떻게 된 건지 저도 궁금했습니다. 상식적으로 휴대전화가 있다면 112신고를 하는 게 먼저였다고 생각했습니다. 112신고를 했는데 전화가 걸리지 않은 건지, 아니면 신고할 생각을 못 했던 건지 알아봐야겠다, '긴급전화' 취재는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 "우리 집은 SKT만 돼…다른 통신사는 잘 안 터질 거야"
피해자들의 변호사를 만나 당시 상황을 들어봤습니다. 사건 당일 피해 여성 외에도 여러 명의 스태프가 강 씨 집에 모여 회식을 겸한 자리를 가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휴대전화가 잘 터지지 않아 강 씨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강 씨는 "여기는 SKT만 잘 터지고, 다른 통신사는 잘 터지지 않는다"라고 답했습니다.

실제 바로 집 뒤편에 산이 있는 강 씨 집 주변에서는 3사 신호가 모두 세게 잡히진 않았습니다. KT 신호는 집 가까이 갈수록 약해졌습니다. 집 내부는 SKT 중계기를 설치해서 해당 통신사의 서비스만 원활하게 됐던 상황이었습니다.

피해 직후 이 여성들은 강 씨가 나가자마자 곧바로 문을 잠그고 먼저 112신고 전화를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전화는 발신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여성들은 이미 전화가 잘 안 터진단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몇 번의 전화를 더 시도한 끝에 다른 방법을 찾게 됩니다.

■ 112 전화 먹통인데 '카톡'이 된 이유는?
통신 상태가 좋지 않았으니 당연히 카톡 서비스도 잘 안 됐을 겁니다. 그런데도 지인들에게 카톡을 보낼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집 안에서 가까스로 비밀번호가 걸려 있지 않은 '개방형 와이파이'를 찾은 겁니다.


피해 여성들이 지인들에게 보낸 카톡 메시지에는 전화가 되지 않는 상황이 잘 드러납니다. 지인에게 현재 위치를 보냈고, 112신고도 부탁합니다. 결국, 피해 여성들을 대신해 지인이 경찰에 신고했고, 위치 추적을 거쳐 경찰이 출동했습니다.

피해 여성 측 국선변호인인 박지훈 변호사는 "피해자들이 상당 시간 갇혀 있는 상태에서 강 씨가 음악을 틀고 문을 두드려 계속 공포를 겪어야 했다며, 사건 직후 112신고가 바로 이뤄져 경찰이 출동했더라면 좀 더 일찍 피해 장소를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 112·119 '긴급전화' 사각지대 있었다


문제는 일반 전화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112, 119 긴급전화는 반드시 걸렸어야 한다는 겁니다. 위급상황에 대비해 긴급전화는 이용하는 통신사 신호가 끊겨도 다른 통신사 주파수를 잡아 전화를 걸게 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KBS 취재 결과 '긴급전화 전환 시스템'을 규정한 현재 통신규격에 사각지대가 있었습니다. 이용하는 통신사 신호가 완전히 끊기지 않고 미약하게라도 잡히면, 타사 망으로 넘어가지 못해 긴급전화 전환 시스템이 아예 작동하지 않는 겁니다.

강 씨 사건 피해 여성들이 이용하는 KT 통신망이 완전히 끊겼다면 주변에 신호가 센 타사 망으로 넘어가 112 긴급전화가 걸렸을 겁니다. 하지만 약한 KT 신호가 잡혔다 끊기기를 반복하며 타사 망으로 전환을 방해했습니다.

■ "위급상황에서 유심을 빼라고? 침이라도 갖고 다니라는 건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통신서비스 상태가 좋지 않은 이른바 '음영지역'에서 긴급전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정부도 이통사·제조사와 함께 긴급 대책 마련에 나섰습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사각지대가 발견된 통신규격을 보완하는 겁니다. 다만 이 규격은 국내에서 사업자들이 임의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이동통신표준화 기구인 3GPP에서 바꿔야 합니다. 통신 전문가들은 국가마다 통신 상황이나 필요성 등이 달라서 동일한 기준을 정하는 게 쉽지 않지만, 통신규격을 바꾸는 것이 사각지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실제 긴급전화 등에 관한 통신규격은 단말기 제조사와도 관련 있는 문제여서 국제적인 기준에 따라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국내 사업자들 간에 만든 규격에 별도 기준을 마련하는 것도 검토 중입니다. 주무 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일정 기준 이하로 신호가 약해져 사실상 통신이 끊긴 것과 같은 상황일 때 타사 망으로 전환되도록 하거나, 단말기 자체 표준을 변경하는 방안 등을 다각적으로 검토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제한된 방송 뉴스에서 이 같은 내용을 모두 소개하지 못하다 보니, 당장 위급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미완적인 방법만을 소개하게 됐습니다. 바로 '유심' 제거입니다.

앞서 설명한 통신규격에는 1) 적합한 기지국이 없을 경우(제한된 서비스 상태) 2) 단말기에 SIM 카드가 없는 경우 어느 상황에서든 긴급통화가 이뤄질 수 있도록 가입한 이통사에 상관없이 가능한 기지국에 접속해야 한다고 돼 있습니다. 실제 유심이 없으면 주변에 가장 센 신호를 잡아 긴급전화가 걸립니다.

하지만 뾰족한 수단이 있어야 제거할 수 있고, 위급 상황에 처했을 때를 고려한다면 '유심 제거'는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이자 임시방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합니다.

■ 5G 속도 경쟁만큼 '음영지역' 줄이는 노력도 필요

지난해 11월 KT 아현 통신구 화재로 유·무선 전화와 인터넷 등 주변 지역의 모든 통신이 마비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70대 여성이 쓰러진 위급 상황에서 119 긴급전화마저 먹통이 됐습니다. 결국, 이 여성은 숨졌는데 유가족들은 긴급전화가 안 돼 구조가 늦어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도 긴급전화 전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화재로 KT망이 먹통이 됐지만 주변에 약한 신호가 남아 있었고, 타사망으로 전환을 방해해 긴급전화 연결이 안 된 겁니다.

세계 최초 5G 상용화를 내세우며 이통사와 제조사들은 홍보에 여념이 없습니다. 하지만 긴급전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사례처럼 여전히 통신서비스가 취약한 이른바 '음영지역'이 남아 있습니다. 5G 속도 경쟁에만 몰두하기보다는 부족한 서비스를 보완하는 노력이 우선입니다.

이번 계기로 긴급전화 시스템 점검에 들어간 정부가 어떤 실효성 있는 대책을 내놓을지도 지켜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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