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의 ‘운명’ 2막을 열다

입력 2017.05.10 (02:53) 수정 2017.05.10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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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의 ‘운명’ 2막을 열다

문재인의 ‘운명’ 2막을 열다

그는 누군가의 반 걸음 쯤 뒤에 서 있는 게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격정적 연설가 노무현의 뒤에서, 두툼한 안경을 낀, 진지한 표정의 모습은 대중이 기억하는 그에 대한 첫 인상이다.

유신 반대 시위에 참가해 아버지의 속을 썩였던 아들, 인권 변호사로 사회 변혁을 꿈꿨지만 그는 정치 보다는 히말라야 트레킹을 떠나고 싶은 '자유인'을 원했다.

그런 그가 이제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9년 만에 이뤄진 진보 세력의 재집권, 문재인은 이제 19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섰다.

피난민의 아들

1953년 1월 경남 거제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함경남도 흥남 출신인 아버지는 50년 12월 '흥남철수' 때 월남했다. '흥남철수'는 영화 국제시장의 덕수(황정민 분) 가족이 내려온 바로 그 사건이다.

어린 시절 문재인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포로수용소에서 막노동을 했고, 어머니는 그를 업고 계란 행상을 했다.

문재인의 중학 시절문재인의 중학 시절


머리는 명석해 부산 명문 경남고를 수석으로 입학했다. 하지만 그는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보낸다. 반항심이 강했고, '노는 친구'들과 어울렸다. 시험 부정행위와 술·담배가 적발돼 정학을 네 번 당했다. 서울대 상대 입시에서 낙방했고, 재수 끝에 72년 경희대 법대에 입학한다.

경남고 시절의 문재인경남고 시절의 문재인


대학 와서는 공부보다는 데모를 주로 했다. 4학년 때인 75년 유신독재 화형식을 벌이다 구속돼 서대문 구치소에서 4개월간 수감됐다. 장남에게 실망한 아버지는 한 번도 면회를 오지 않았다고 한다.

경희대 재학 시절 문재인(맨 왼쪽)과 여자 친구 김정숙 경희대 재학 시절 문재인(맨 왼쪽)과 여자 친구 김정숙

그때는 시위 학생들을 강제 징집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특전사령부 제1공수여단에 배치됐다.

'끌려간' 군대였지만, 문재인은 '군 체질'이었다. 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때 최정예 요원으로 선발돼 미루나무 제거 작전에 투입될 정도로 '모범 사병'이었다.

지난 3월 당 내 경선 토론회 때 그는 '전두환 당시 여단장으로부터 표창까지 받았다'고 자랑했다가 구설에 휘말렸다. 자신의 안보관을 설명하기 위한 농담조의 발언이었는데, 경쟁 후보들의 공격 소재가 됐다. 각진 베레모에 날카로운 눈빛의 그의 특전사 시절 사진은 몇 년 전 인터넷에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군대 시절 문재인군대 시절 문재인

78년 제대했지만, 구속 전력으로 복학이 안 됐다. 취직은 더욱이 어려웠다. '백수 시절' 그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49재를 마치고 전남 해남 대흥사에 들어가 사법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그는 '죽기 살기'로 공부했다고 한다. 누우면 잠 들까 봐 방에 물을 뿌렸다. 독하게 공부한 덕에 비교적 단기간인 79년 사법시험 1차, 다음 해 2차에 합격했다.

80년 서울의 봄, 시법시험 2차를 치르고 시위에 나갔다가 또 유치장 신세를 진다. 2차 합격 소식은 유치장에서 들었다. 유치장 면회 온 동창들과 '축하 파티'를 벌였다.

다음 해 사법연수원에 입소하면서 안정을 찾자 7년 간 연인으로 지내던 경희대 성악과 2년 후배 김정숙(63) 여사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대학 시절의 문재인과 김정숙대학 시절의 문재인과 김정숙

인권변호사

희망했던 판사는 되지 못했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했지만, 시위 경력이 문제가 됐다.부산으로 내려가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다.

그의 인생을 바꾼 운명적인 사건, 노무현과의 만남은 이때 이뤄진다. 두 사람은 '노무현-문재인 합동 법률사무소' 간판을 내걸었다. 돈벌이보다는 시국 사건들을 도맡은 두 사람은 누구보다 죽이 맞는 동지가 된다.

부산 변호사 사무실에서 어머니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부산 변호사 사무실에서 어머니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1987년 6월 항쟁 때 부산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이끌던 노무현 변호사는 88년 야당 지도자 김영삼(YS) 총재에게 발탁돼 국회의원이 된다. 함께 인권 변호사를 하던 김광일 변호사도 국회의원이 된다. 문재인은 "부산 경남 지역 전체에 인권 변호사는 고작 서너 명이었다. 다들 정치로 가고 나 혼자 남았다"고 회상했다.

변호사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과 여행을 하던 문재인(왼쪽)변호사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과 여행을 하던 문재인(왼쪽)

참여정부 2인자

중앙 무대에 데뷔한 것은 2002년 대선 후였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면서 그를 차출했다. "민정수석으로 끝낸다"는 조건을 걸고 수락했다고 한다.

민정수석이란 자리는 검찰 업무와 민심 동향, 친인척 관리를 맡는 보직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신임이 두터운 사람에게 민정수석을 맡겼다.

김한길 전 의원은 "문재인 씨가 서울 올라온 지 얼마 안돼 나를 만나자 '서울에선 집을 어떻게 구합니까"라고 물더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김 전 의원의 기억처럼 문재인의 상경은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군대 간 아들을 면회한 문재인 부부군대 간 아들을 면회한 문재인 부부

이후 1년여 만인 2004년 2월 그는 '자유인'으로 돌아갔지만, 히말라아 트레킹 여행을 떠난 현지에서 노 전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 국회 의결 소식을 접한다.

노 전 대통령 대리인단에 참여한 문재인은 노무현 대통령 복귀와 함께 청와대 시민사회 수석에 임명된다. 이후 민정수석, 비서실장을 맡으며 참여정부의 사실상 2인자로 활동했다.

노무현의 죽음

참여정부의 마지막은 낮은 지지율 속에 친노 세력들이 스스로 '폐족'이라 칭할 만큼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청와대 비서실장 시절 업무 스트레스로 치아 10개를 뽑은 문재인은 경남 양산으로 쓸쓸히 낙향한다.

양산에서 머물던 그를 정치로 불러낸 계기 역시 '노무현'이었다.

2009년 5월 23일 오전 9시 30분, 비보가 전해진다. 검찰 수사를 받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은 그가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정치인의 길로 이끈다.

사람들은 30년 동지를 잃은 아픔 속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던 상주 문재인에 주목했다. 노 전 대통령 영결식 당시 백원우 민주당 의원이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소리치자 문재인이 사과하며 예를 갖추는 모습이 부각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에서 열린 안장식 모습.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에서 열린 안장식 모습.

노 전 대통령 추모 열기에 힘입어 인기가 계속 오르자 결국 그는 현실 정치 참여를 결심한다. 2012년 4월 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에서 당선됐고, 그해 6월 대선 출마를 선언한다.

무소속 안철수 후보와의 경쟁 끝에 단일 후보가 된 뒤 박근혜 후보와 맞섰지만, 역대 당선자를 능가하는 득표(1,469만 표, 48%)하고도 집권에 실패한다.

정치적 동면에 들어갔던 그는 2013년 저서 '1219 끝이 시작이다'를 펴내면서 정치 활동을 재개한다. 2015년 2월 새정치민주연합의 당 대표로 선출되면서 본격적인 '대권 재수'의 길을 시작한다.

이후에도 곳곳이 지뢰밭이었다. 그는 스스로 "3번의 죽을 고비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새정치연합 안철수 전 대표는 그 해 12월 탈당을 선언했다. 안 전 대표는 호남을 기반으로 국민의 당을 창당했다.

야권 분열 위기 속에 그는 총선을 석 달 앞두고 비상대책위원장으로 김종인 전 대표를 영입한다. 우려 대로 더불어민주당은 텃밭인 호남을 국민의당에 내주는 '아픔'을 겪었지만, 수도권 압승을 바탕으로 원내 1당 등극이라는 성과도 올린다.

이후에도 평탄하지 않았다. 당 내의 친문 패권 논란은 계속됐고, 그를 내세울 경우 대선 승리가 어렵다는 '문재인 필패론'은 대선 국면에서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노무현 브랜드' 의 한계, 확장성이 없어 지지율이 30%대를 넘지 않을 것이라는 혹평은 계속됐다. 여론조사에서 반기문 UN 사무총장의 지지율은 그를 월등히 앞섰다. 더불어민주당 경선 과정에서는 안희정 충남지사의 돌풍이 한때 불었다.

그럼에도 결국 2017 대한민국의 선택은 문재인이었다. 문재인은 숱한 고비를 이겨냈다. 경쟁 후보를 월등히 앞서는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문재인 압승은 대통령 탄핵 사태를 초래한 우파 정권 10년에 대한 실망감, 보수 후보 분열에 따른 반사 이익, 그리고 문재인이라는 정치인이 보여준 국민적 신망과 촛불 민심이 상징하는 변화의 욕구가 복합적으로 반영된 결과였다. 정치 입문 6년 만에 그는 대권을 거머 쥐는 보기 드문 성공사를 써냈다.

그러나 그의 정치 인생이 어떻게 마무리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퇴임 발걸음은 대부분 무거웠다. 그 역시 그런 길을 걷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런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는 그는 '국민 통합'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열광적인 지지층의 반대편에선 그가 아직도 패권주의와 진영 논리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냉소적인 시각이 있다. 엄중한 안보 상황과 둔화되는 경제 성장률, 개선되지 않고 있는 청년실업 등 숱한 난제는 그에게 또 다른 도전을 요구하고 있다. 5년 뒤 그는 어떤 대통령으로 남을 것인가.

문재인의 '운명'은 이제 2막을 시작하려는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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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재인의 ‘운명’ 2막을 열다
    • 입력 2017-05-10 02:5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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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재K
그는 누군가의 반 걸음 쯤 뒤에 서 있는 게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격정적 연설가 노무현의 뒤에서, 두툼한 안경을 낀, 진지한 표정의 모습은 대중이 기억하는 그에 대한 첫 인상이다.

유신 반대 시위에 참가해 아버지의 속을 썩였던 아들, 인권 변호사로 사회 변혁을 꿈꿨지만 그는 정치 보다는 히말라야 트레킹을 떠나고 싶은 '자유인'을 원했다.

그런 그가 이제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9년 만에 이뤄진 진보 세력의 재집권, 문재인은 이제 19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섰다.

피난민의 아들

1953년 1월 경남 거제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함경남도 흥남 출신인 아버지는 50년 12월 '흥남철수' 때 월남했다. '흥남철수'는 영화 국제시장의 덕수(황정민 분) 가족이 내려온 바로 그 사건이다.

어린 시절 문재인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포로수용소에서 막노동을 했고, 어머니는 그를 업고 계란 행상을 했다.

문재인의 중학 시절

머리는 명석해 부산 명문 경남고를 수석으로 입학했다. 하지만 그는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보낸다. 반항심이 강했고, '노는 친구'들과 어울렸다. 시험 부정행위와 술·담배가 적발돼 정학을 네 번 당했다. 서울대 상대 입시에서 낙방했고, 재수 끝에 72년 경희대 법대에 입학한다.

경남고 시절의 문재인

대학 와서는 공부보다는 데모를 주로 했다. 4학년 때인 75년 유신독재 화형식을 벌이다 구속돼 서대문 구치소에서 4개월간 수감됐다. 장남에게 실망한 아버지는 한 번도 면회를 오지 않았다고 한다.

경희대 재학 시절 문재인(맨 왼쪽)과 여자 친구 김정숙
그때는 시위 학생들을 강제 징집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특전사령부 제1공수여단에 배치됐다.

'끌려간' 군대였지만, 문재인은 '군 체질'이었다. 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때 최정예 요원으로 선발돼 미루나무 제거 작전에 투입될 정도로 '모범 사병'이었다.

지난 3월 당 내 경선 토론회 때 그는 '전두환 당시 여단장으로부터 표창까지 받았다'고 자랑했다가 구설에 휘말렸다. 자신의 안보관을 설명하기 위한 농담조의 발언이었는데, 경쟁 후보들의 공격 소재가 됐다. 각진 베레모에 날카로운 눈빛의 그의 특전사 시절 사진은 몇 년 전 인터넷에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군대 시절 문재인
78년 제대했지만, 구속 전력으로 복학이 안 됐다. 취직은 더욱이 어려웠다. '백수 시절' 그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49재를 마치고 전남 해남 대흥사에 들어가 사법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그는 '죽기 살기'로 공부했다고 한다. 누우면 잠 들까 봐 방에 물을 뿌렸다. 독하게 공부한 덕에 비교적 단기간인 79년 사법시험 1차, 다음 해 2차에 합격했다.

80년 서울의 봄, 시법시험 2차를 치르고 시위에 나갔다가 또 유치장 신세를 진다. 2차 합격 소식은 유치장에서 들었다. 유치장 면회 온 동창들과 '축하 파티'를 벌였다.

다음 해 사법연수원에 입소하면서 안정을 찾자 7년 간 연인으로 지내던 경희대 성악과 2년 후배 김정숙(63) 여사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대학 시절의 문재인과 김정숙
인권변호사

희망했던 판사는 되지 못했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했지만, 시위 경력이 문제가 됐다.부산으로 내려가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다.

그의 인생을 바꾼 운명적인 사건, 노무현과의 만남은 이때 이뤄진다. 두 사람은 '노무현-문재인 합동 법률사무소' 간판을 내걸었다. 돈벌이보다는 시국 사건들을 도맡은 두 사람은 누구보다 죽이 맞는 동지가 된다.

부산 변호사 사무실에서 어머니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1987년 6월 항쟁 때 부산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이끌던 노무현 변호사는 88년 야당 지도자 김영삼(YS) 총재에게 발탁돼 국회의원이 된다. 함께 인권 변호사를 하던 김광일 변호사도 국회의원이 된다. 문재인은 "부산 경남 지역 전체에 인권 변호사는 고작 서너 명이었다. 다들 정치로 가고 나 혼자 남았다"고 회상했다.

변호사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과 여행을 하던 문재인(왼쪽)
참여정부 2인자

중앙 무대에 데뷔한 것은 2002년 대선 후였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면서 그를 차출했다. "민정수석으로 끝낸다"는 조건을 걸고 수락했다고 한다.

민정수석이란 자리는 검찰 업무와 민심 동향, 친인척 관리를 맡는 보직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신임이 두터운 사람에게 민정수석을 맡겼다.

김한길 전 의원은 "문재인 씨가 서울 올라온 지 얼마 안돼 나를 만나자 '서울에선 집을 어떻게 구합니까"라고 물더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김 전 의원의 기억처럼 문재인의 상경은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군대 간 아들을 면회한 문재인 부부
이후 1년여 만인 2004년 2월 그는 '자유인'으로 돌아갔지만, 히말라아 트레킹 여행을 떠난 현지에서 노 전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 국회 의결 소식을 접한다.

노 전 대통령 대리인단에 참여한 문재인은 노무현 대통령 복귀와 함께 청와대 시민사회 수석에 임명된다. 이후 민정수석, 비서실장을 맡으며 참여정부의 사실상 2인자로 활동했다.

노무현의 죽음

참여정부의 마지막은 낮은 지지율 속에 친노 세력들이 스스로 '폐족'이라 칭할 만큼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청와대 비서실장 시절 업무 스트레스로 치아 10개를 뽑은 문재인은 경남 양산으로 쓸쓸히 낙향한다.

양산에서 머물던 그를 정치로 불러낸 계기 역시 '노무현'이었다.

2009년 5월 23일 오전 9시 30분, 비보가 전해진다. 검찰 수사를 받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은 그가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정치인의 길로 이끈다.

사람들은 30년 동지를 잃은 아픔 속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던 상주 문재인에 주목했다. 노 전 대통령 영결식 당시 백원우 민주당 의원이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소리치자 문재인이 사과하며 예를 갖추는 모습이 부각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에서 열린 안장식 모습.
노 전 대통령 추모 열기에 힘입어 인기가 계속 오르자 결국 그는 현실 정치 참여를 결심한다. 2012년 4월 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에서 당선됐고, 그해 6월 대선 출마를 선언한다.

무소속 안철수 후보와의 경쟁 끝에 단일 후보가 된 뒤 박근혜 후보와 맞섰지만, 역대 당선자를 능가하는 득표(1,469만 표, 48%)하고도 집권에 실패한다.

정치적 동면에 들어갔던 그는 2013년 저서 '1219 끝이 시작이다'를 펴내면서 정치 활동을 재개한다. 2015년 2월 새정치민주연합의 당 대표로 선출되면서 본격적인 '대권 재수'의 길을 시작한다.

이후에도 곳곳이 지뢰밭이었다. 그는 스스로 "3번의 죽을 고비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새정치연합 안철수 전 대표는 그 해 12월 탈당을 선언했다. 안 전 대표는 호남을 기반으로 국민의 당을 창당했다.

야권 분열 위기 속에 그는 총선을 석 달 앞두고 비상대책위원장으로 김종인 전 대표를 영입한다. 우려 대로 더불어민주당은 텃밭인 호남을 국민의당에 내주는 '아픔'을 겪었지만, 수도권 압승을 바탕으로 원내 1당 등극이라는 성과도 올린다.

이후에도 평탄하지 않았다. 당 내의 친문 패권 논란은 계속됐고, 그를 내세울 경우 대선 승리가 어렵다는 '문재인 필패론'은 대선 국면에서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노무현 브랜드' 의 한계, 확장성이 없어 지지율이 30%대를 넘지 않을 것이라는 혹평은 계속됐다. 여론조사에서 반기문 UN 사무총장의 지지율은 그를 월등히 앞섰다. 더불어민주당 경선 과정에서는 안희정 충남지사의 돌풍이 한때 불었다.

그럼에도 결국 2017 대한민국의 선택은 문재인이었다. 문재인은 숱한 고비를 이겨냈다. 경쟁 후보를 월등히 앞서는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문재인 압승은 대통령 탄핵 사태를 초래한 우파 정권 10년에 대한 실망감, 보수 후보 분열에 따른 반사 이익, 그리고 문재인이라는 정치인이 보여준 국민적 신망과 촛불 민심이 상징하는 변화의 욕구가 복합적으로 반영된 결과였다. 정치 입문 6년 만에 그는 대권을 거머 쥐는 보기 드문 성공사를 써냈다.

그러나 그의 정치 인생이 어떻게 마무리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퇴임 발걸음은 대부분 무거웠다. 그 역시 그런 길을 걷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런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는 그는 '국민 통합'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열광적인 지지층의 반대편에선 그가 아직도 패권주의와 진영 논리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냉소적인 시각이 있다. 엄중한 안보 상황과 둔화되는 경제 성장률, 개선되지 않고 있는 청년실업 등 숱한 난제는 그에게 또 다른 도전을 요구하고 있다. 5년 뒤 그는 어떤 대통령으로 남을 것인가.

문재인의 '운명'은 이제 2막을 시작하려는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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